
[더퍼블릭=최얼 기자]지난 14일 정부가 대미 관세협상 타결을 위해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제한 완화를 검토 중이라는 내용이 보도됐다. 심지어 관세협상을 주도해 온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입에서는 “농축산물도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입장까지 나왔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일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낸 ‘관세서한’에서 비롯된 관세협상카드이다. 당시 미국측이 보낸 서한에는 이달 9일로 예정됐던 한국산 수입제품에 대한 25% 상호관세 부과, 비관세장벽 철회,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금지 해제 등의 내용들이 담겨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2008년 광우병 사태를 겪으며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제한했고, 현재까지 한국에서 이 조치는 유지되고 있다. 월령 검역제도를 실시하는 국가는 러시아, 벨라루스, 한국 뿐이다. 이에 미국은 한국 때문에 월령 검역 제도를 유지하느라 비용이 많이 든다며 철폐를 압박하는 것이다. 미국은 소고기 뿐 아니라 쌀 개방까지 압박하는 모양새다. 현재 한국은 미국산 쌀에 대한 쿼터제(13만2304t까지 관세율 5%, 초과 땐 513%)가 발효된 상태이지만, 시장이 개방된다면 꽤 많은 양의 쌀이 국내에 수입되면서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는 농민들 입장에서 매출감소를 우려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이에 일각에서는 결정권을 가진 대통령실이 하루라도 빨리 공론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론화가 이뤄지게된다면, 쌀‧소고기 수입에 대한 자세한 여론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이를 공론화 하게 된다면 정치권에서 여러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동시에 높아진다. 이재명 정부가 양곡관리법에 대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산 쌀을 수입한다는 점, 진보진영에서 반발이 심한 미국산 소 수입이 협상카드로 제시될 수 있다는 점, ‘임기 내 전시작전권 환수’공약에 대한 기류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점 등이 쟁점이 될만한 요인들이다.
참고로 윤석열 정부는 민주당의 입법공세에 양곡관리법에 2번이나 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반대로 민주당은 이재명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 국민의힘의 반발에도 양곡관리법을 2번이나 강행 처리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페이스북에서도 △농업재해 보상 현실화 및 생산비 부담 완화 △스마트농업 확산 △농업인 퇴직연금제 도입 △농정예산 확대 △양곡관리법 개정 등 다섯 가지를 약속했으며, 급기야 이 자리에서 “농민이 살아야 농업이 살고, 농촌이 유지돼야 지방소멸을 막을 수 있다”는 메시지까지 냈다. 그간 이 대통령이 진보적인 메시지를 내비쳤음에도 정반대 카드를 미국측에 내미는 모양새라는 것.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와 농민단체들은 농축산물 비관세장벽 완화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반대하고 나서고 있다. 특히 강경 진보성향을 나타내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국면 당시 전면에 나서서 진보진영에 힘을 실어준 단체다. 전농은 미국 소고기‧쌀수입 논란에 대해 “미국의 요구를 보면 미국산 사과 수입, 수입쌀 추가 개방,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 등 온통 우리 농업을 파괴하는 요구뿐”이라며 “국민 대다수가 미국과 섣불리 협상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만큼, 정부는 조속한 협상을 이유로 농업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입장이다.
또 다른 진보단체인 민주노총(이하 민노총) 역시, 이재명 정부에 노란봉투법·회계공시 제도 폐지·작업중지권 법제화 등을 요구하면서 ‘윤석열 정부 노동정책 지우기’를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민주당이 지난 대선기간 약속한 노란봉투법 추진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재명 정부에서는 노란봉투법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아, 양곡관리법과 유사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다. 물론 이재명 정부는 고용노동부 장관에 민주노총 출신 인사를 내세워 민노총 달래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노무현 정부(2002~2007)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진보진영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행보를 보여 적잖은 비판여론에 직면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한미 FTA 체결을 밀어붙이며 노동계, 농민단체, 진보 시민사회와 정면충돌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설명하고 이해시키면 따라올 것”이란 취지의 입장은 진보진영 내에서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지지층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FTA뿐 아니라, 평택미군기지 이전도 진보진영내에 반발에 부딪혔다. 반대 시위는 600일 이상 전국적으로 이어졌고, 시위대는 “수십 년 동안 개간해 만든 우리땅을 다시 빼앗긴다”며 반발 수위를 높였다.
이들은 특히 전시작전권(전작권) 회수까지 노 전 대통령에게 요구했고, 대통령도 전작권 환수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2006년 1월 북한의 1차 핵실험에서 비롯된 반발여론과 현실적인 문제 등에 의해 전작권 이양은 불발됐고,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결국 미국 눈치보기에 급급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진보진영에서 제기됐다. 이후 19년 뒤, 이 대통령도 임기내 전작권 환수를 공약했다. 그러나 합참 등 군 내부에서는 절대 대한민국이 먼저 미국측에 전작권 이양을 요구해선 안된다는 우려섞인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으며, 대통령실 역시 안규백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5년 내 전작권 환수’주장에 대해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에 전작권 이양과 관련한 입장과 결과 모두, 두 정부가 흡사할 것으로 보여지는게 사실이다. 물론 이재명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몇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이재명 정부는 현재 60%p에 육박하는 높은 지지율을 나타내고 있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임기가 1년이상 지난 터라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낮았다. 또한 두 대통령 모두 진보적 색채를 많이 내뿜었다는 공통점이 있더라도참고, 실용주의를 강조한 이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 비교해 약속 뒤집기에 대한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국익에 도움 되지 않아 기존입장을 바꾼다”는 취지의 ‘말 뒤집기’가 이재명 정부에서 더 원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보다 취약한 부분도 존재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임시적으로 중단된 재판만 5개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언제든지 지지율 하락이 동반된다면 재판이 재개될 가능성을 시사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자칫 대통령이 ‘인기병합주의’(포퓰리즘) 유혹에 노출될 가능성을 우려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변화도 노 전 대통령 보다 이 대통령이 더 취약할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노 전 대통령 탄핵국면 당시에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 탄핵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이후 23년동안 대한민국에서 2명의 대통령(박근혜, 윤석열)이 탄핵됐다. 즉, 더 이상 국민들이 대통령 탄핵을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이 대통령의 5년 임기동안 이재명 정부의 ‘진보 우클릭’이 실용주의로 인정받게 되어 지속될 수 있을지, 아니면 주요 지지층들의 이탈로 국정동력 약화를 초래할지 추후 정치권의 주요 관전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18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64%이며, 같은 임기기간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60%로 집계됐다. (18세 이상 1000명 대상, 응답률은 12.8%,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더불어 민주당 지지도 46%, 중앙선거 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참조가능)
더퍼블릭 / 최얼 기자 chldjf1212@thepubl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