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퍼블릭=최얼 기자]이재명 대통령은 4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을 포함해 세 번째 도전 만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소년공(少年工) 출신인 그는 과거 자신의 책에서 “나는 겁이 없다”며 “날 때부터 강심장이어서가 아니라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1963년(호적에는 1964년) 경북 안동에서 부친 이경희씨와 모친 구호명씨 사이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온 가족이 경기 성남시로 이주했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못 갔고 성남 상대원 공단에 있는 공장에 취업했고, 취직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어서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대통령은 이에 본인 스스로 “위장 취업의 원조”라고 한다. 6년 동안 소년공으로 공장 6곳을 전전했다.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에서 가죽을 누르는 프레스에 왼쪽 팔뚝이 눌리는 사고를 당했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왼팔은 점점 휘었고 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
이 장애로 병역을 면제받았고, 이 대통령은 이 시기 두 번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면제를 달라는 소년 이재명에게 약사들이 몰래 소화제를 내줘 목숨을 건졌다.
이 대통령은 공장에서 자신을 못살게 구는 간부가 ‘고졸(高卒)’이라는 걸 알고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공장 간부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고학(苦學)을 시작해 1978년 중졸, 1980년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고졸 자격증을 따니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이때 졸지 않으려고 책상에 압정을 뿌려놓고 하루 2시간씩 자며 대입 학력고사를 준비했다.
이 대통령은 1982년 전액 장학금과 매달 생활비로 20만원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 판검사 임용이 가능한 성적을 받았지만 변호사를 택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이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했고,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경기 이천·광주의 노동상담소장도 맡았다. 변호사이자 시민 활동가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성남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을 고발했고,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주도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전과를 얻게되며, 대선기간 내내 그의 전과이력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구체적으로 이 대통령은 성남 시민 서명을 받아 시립병원 설립 조례안을 발의했지만 시의회에서 불과 47초 만에 부결됐다.
이에 시민들이 항의하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들의 대표 격인 이 대통령에겐 수배령이 떨어졌다. 이 대통령은 “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 숨어 몇 날 며칠 고민하다 내가 시장이 돼서 내 손으로 병원을 짓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2005년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2006년 성남시장 선거, 2008년 경기 성남 분당갑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뒤 2010년 세 번째 도전 만에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2014년 재선에 성공한 이 대통령은 청년 배당과 무상 교복, 무상 산후조리원 등 ‘3대 무상 복지 정책’을 추진해 중앙 정계에도 이름을 알렸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때는 민주당 정치인 중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을 주장하며 전국구 정치인으로 도약했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때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이 대통령은 2017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했다. 팬클럽 ‘손가락혁명군’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이어 3위를 했다. 하지만 이 경선을 통해 차기 대선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2018년엔 경기지사에 당선되며 정치적 체급을 키웠다.
이 대통령은 2022년 대선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의 비주류 정치인이었다. 2017년 대선 경선 때 문 전 대통령을 거칠게 몰아붙여 친문(親文·친문재인) 세력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문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 당시 친문 주류 세력으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았고 일부 친문 지지자는 그의 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경기지사를 하며 당내 기반을 넓힌 그는 2022년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와 민주당 대표를 지낸 이낙연 전 의원을 누르고 민주당 후보가 됐다. 이 대선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패했지만 곧바로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됐고, 그해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선 77.77% 득표율로 당대표에 선출됐다.
이후 그는 당권을 휘어잡은채 지난 4월 총선에서 ‘친명횡재 비명횡사’공천으로 온갖 비난을 받게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실정으로 총선에서 민주당은 175석을 차지하며 압승했다. 민주당이 압승한 뒤 이재명 체재의 민주당은 국정파괴 수준의 윤석열 정부 견제에 나섰고, 이후 비상계엄 국면을 맞이하며 기회를 얻게된다.
이 대통령은 정치적 경력을 쌓아오는 과정에서 각종 형사 재판에 휘말리며 정치적 벼랑 끝에 내몰리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최근까지 형사 재판 5개를 받아 왔고, 지난달 1일엔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됐지만 형이 확정되기 전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어떻게 보면 5개 혐의를 받는 피고인이 무고함을 입증하지도 못한채 대통령에 당선된 거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온갖역경을 이겨내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더퍼블릭 / 최얼 기자 chldjf1212@thepubl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