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퍼블릭=김영일 기자]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는 ‘반도체 저승사자’란 별칭이 뒤따른다.
2021년 8월 모건스탠리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겨울의 다가오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통해 메모리 반도체 업황 하락 가능성을 제기했고, 이는 투자 심리를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를 흔들었다.
이때부터 모건스탠리에는 ‘반도체 저승사자’란 별칭이 붙게 됐는데, 지난 4월에는 ‘메모리-빙산이 다가온다’는 보고서를 통해 미국발 관세 영향을 ‘보이지 않는 위험’에 비유하며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비관론을 제기하기는 등 반도체 저승사자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그랬던 모건스탠리가 불과 5개월여 만에 메모리 반도체에 친화적인 전망을 내놔, 반도체 업계는 물론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최근 ‘메모리 슈퍼사이클–AI(인공지능)의 부상으로 모든 산업에 호황’이란 보고서를 통해 “올해는 따뜻한 겨울”이라고 진단한 것인데, 이는 AI 수요 증가에 힘입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호황을 맞아 2027년 정점에 이를 것이란 분석이다.
따라서 모건스탠리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의견을 ‘시장 평균 수준(in-line)’에서 ‘매력적(attractive)’으로 상향했다. 특히 삼성전자에 대해선 ‘최선호주(Top Pick)’ 의견을 유지하며, 목표 주가를 기존 8만 6000원에서 9만 6000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SK하이닉스에 대한 투자 의견도 ‘중립(Equal-weight)’에서 ‘비중 확대(Overweight)’로 상향, 목표 주가는 26만원에서 41만원으로 대폭 올렸다. 이에 <더퍼블릭>이 한국 반도체 산업에 비관적이었던 반도체 저승사자가 친화적으로 입장을 바꾼 배경에 대해 짚어봤다.
AI 고도화될수록 GPU‧HBM 중요성 커져…‘AI 학습’에 GPU가 적합한 이유
AI(인공지능)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급성장 중이며, 금융‧제조‧서비스‧헬스케어‧보안 등 다양한 산업에 혁신을 가져오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에 따라 수치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2024년 3000억 달러 규모였던 글로벌 AI 시장은 2030년까지 수조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AI가 고도화될수록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같은 AI 반도체, 그리고 GPU 성능을 극대화시켜주는 HBM(고대역폭 메모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먼저 AI 반도체인 GPU에 대해 살펴보자면, 컴퓨터의 두뇌 역할을 하는 CPU(중앙처리장치)와의 차이점은, CPU가 요리 실력이 뛰어난 최고의 요리사라면, GPU는 수백 명의 보조 요리사와 같다.
햄버거를 만든다고 가정하면, CPU는 뛰어난 요리 실력을 지닌 최고의 요리사가 햄버거 하나를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과 같다. GPU는 수십 명의 보조 요리사가 동시에 패티를 굽고, 채소를 썰고, 빵을 굽는 등 단 몇 분 만에 햄버거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최고의 요리사 한 명이 정성을 들여 ‘미슐랭 3스타’ 등급의 햄버거를 만들 순 있지만, 여러 손님이 동시다발적으로 주문을 하게 되면, 미슐랭 3스타 등급의 햄버거만큼은 못하더라도 보조 요리사 수십명이 달려들어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는 게 합리적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반복적으로 분석해 정확하고 정교한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AI 학습’에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행렬 연산이 반복적으로 수행된다.
이러한 연산에는 순차적이고 복잡한 단일 작업에 적합한 CPU보다, 수많은 단순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는 데 특화된 GPU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원래 게임용 GPU를 개발해 왔던 미국의 엔비디아가 AI에 최적화된 고성능 GPU를 지속적으로 개발하면서, 사실상 AI용 GPU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D램 쌓아 올려 만든 HBM, GPU 성능 극대화…HBM 10개 중 8개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생산
HBM은 기존 D램(컴퓨터의 주 기억장치, 메모리 반도체의 일종)을 수직으로 여러 층 쌓아 올려 데이터 처리 속도와 효율성을 높인 고대역폭 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 반도체다.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기 때문에 GPU의 성능을 극대화 시켜준다.
또한 데이터를 수직으로 이동시켜 전력 소모를 줄이는 등 에너지 효율성이 높아, AI 학습 및 AI가 학습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과를 예측하거나 생성하는 등 ‘추론’하는데 필요한 고성능 컴퓨터와 전력‧냉각 시스템을 갖춘 ‘AI 데이터센터’ 운영 비용을 절감하는 데도 기여한다.
전 세계에 유통되는 HBM 10개 중 8개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이 만들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 2분기 HBM 출하량 점유율 기준 SK하이닉스가 62%로 1위, 마이크론(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21%로 2위, 삼성전자가 17%로 3위를 기록했다.
이는 전 세계 HBM 10개 중 8개를 한국 기업이 생산하고 있다는 얘기다. 아울러 올해 말 출시 예정인 HBM4(6세대 고대역폭메모리) 역시 이러한 시장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게 카운터포인트리서치의 설명이다.
카운터포인트는 특히 내년에 삼성전자가 HBM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릴 것으로 내다봤다.
카운터포인트는 “올 2분기 삼성전자는 예상보다 저조한 시장 점유율(17%)을 기록했지만, 최근 주요 고객향 HBM3E(5세대 고대역폭메모리) 제품 인증과 내년 HBM4 수출을 기반으로 점유율을 확대해 2026년에는 점유율이 30%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카운터포인트가 거론한 ‘최근 주요 고객향 HBM3E 제품 인증’은 삼성전자의 HBM3E 12단 제품이 엔비디아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지난 22일자 리포트에서 “최근 삼성전자는 엔비디아로부터 HBM3E 12단 제품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해 구매 주문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며 “이는 2024년 2월 삼성전자가 HBM3E 12단 개발을 완료한 지 18개월 만에 이뤄진 성과로, 1a D램(5세대 10나노급 D램) 재설계를 통해 성능 개선을 구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내년 삼성전자 HBM 점유율 상승 전망…SK하이닉스, HBM4 개발 및 양산 체제 구축으로 선두 주자 재확인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에 이어 엔비디아에 HBM3E 12단 제품을 공급하는 세 번째 공급사가 됐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HBM3E 엔비디아 납품 물량은 소량일 것으로 관측된다.
HBM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SK하이닉스와 점유율 2위를 기록 중인 마이크론이 이미 엔비디아에 상당한 물량을 공급 중인 상황이기 때문에 후발주자인 삼성전자가 많은 양을 공급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
다만, 카운터포인트가 예상한 바와 같이 내년에는 삼성전자의 HBM 점유율 상승이 기대된다.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삼성전자 등 3사는 내년에 출시되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GPU(루빈)에 탑재될 HBM4 샘플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김동원 연구원은 “최근 엔비디아는 HBM 제조사에 HBM4 데이터처리 속도를 초당 10Gbps(1초에 100억 비트의 데이터 전송, 기가 인터넷(1Gbps)보다 10배 빠름) 이상 상향을 요청했고, HBM4 기반의 루빈 출시도 내년 상반기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삼성전자는 엔비디아 HBM4 성능 상향의 직접적 수혜가 기대된다”고 내다봤다.
이어 “삼성전자 HBM4는 1c D램(10나노급 6세대 D램)과 4nm(4나노미터, 1㎚=10억분의 1m) 파운드리를 로직 다이에 적용하면서, 데이터처리 속도는 공급사 중에서 가장 높은 성능인 11Gbps를 구현, 엔비디아 요구 조건인 스펙 상향과 물량 확대를 동시에 충족 시켜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내년에는 삼성전자의 HBM 점유율이 상승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미 HBM3와 HBM3E 시장을 선점하고 엔비디아에 압도적으로 많은 물량을 공급하며 선두를 달리는 SK하이닉스를 곧바로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지난 12일 세계 최초로 HBM4 개발을 완료하고 양산 체제를 구축했다고 발표,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마이크론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등 HBM 분야 선두 주자임을 재확인 한 바 있다.
따라서 HBM4 경쟁에서도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에 가장 먼저 공급하며 시장 리더십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마이크론, 미국발 관세 영향으로 가격 경쟁력 유리 전망…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 기술적 문제 미해결
HBM 시장에서 당분간 SK하이닉스가 선두를 유지하며 삼성전자가 그 뒤를 바짝 따라붙는 그림이 그려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국 반도체 기업이 마이크론과 중국 반도체 기업의 추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최정구 카운터포인트 책임연구원은 “장기적으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HBM 시장을 선도할 것으로 보이나, (미 정부의 수입 반도체 관세 부과 여부 등)지정학적 이점을 지닌 마이크론과 중국의 물량 공세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마이크론의 경우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라는 점에서, 반도체 관세 부과를 예고한 트럼프 행정부가 실제로 한국 등 해외에서 생산된 반도체에 관세를 부과할 경우,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력에서 유리해진다.
즉, 지난 4월 모건스탠리가 ‘메모리-빙산이 다가온다’는 보고서를 통해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 비유했던 미국발 관세 위협이 한국 반도체 기업의 리스크로 남아 있다는 것.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저가 물량 공세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다. 그러나 중국 반도체 회사의 HBM 출하는 예상보다 늦춰질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최정구 책임연구원은 “중국은 CXMT(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 중국 메모리반도체 기업)를 중심으로 HBM3 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나, 동작 속도와 발열 등 기술적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해 당초 올해로 예상됐던 출하는 내년 하반기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어 “최근 이슈가 된 화웨이의 자체 HBM 역시 일반적인 HBM 제품 대비 속도가 절반 이하에 불과한 초기 단계 제품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범용 D램 공급 부족…특수 D램 LPDDR5 및 GDDR7 수요 증가
‘반도체 저승사자’로 지목된 모건스탠리는 불과 5개월여 만에 ‘빙산이 다가온다→올해는 따뜻한 겨울’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HBM을 둘러싼 기회가 (반도체)업계 전반의 성장률을 상회하고 있다. AI 서버와 모바일 D램 수요 확대에 따라 범용 메모리 가격 상승세도 탄력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공급 부족이 전방위적으로 심화되고 있으며, 메모리 산업은 2027년경 정점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최근 수년간 AI 수요 증가에 힘입어 HBM 생산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HBM 생산 역량을 늘리기 위해 기존 범용 D램 생산 라인을 HBM 생산 라인으로 전환함에 따라, PC에 사용되는 DDR5와 같은 범용 D램을 비롯해 ▶LPDDR5(저전력 고성능 모바일 D램) 및 ▶GDDR7(7세대 그래픽 전용 D램) 등 최신 특수 D램 공급이 부족해졌다.
특히 AI 학습 및 추론 역할을 수행하는 AI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모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저전력 특성이 뛰어난 LPDDR이 HBM 보완재로 떠오르고 있다. GDDR7은 기존 GPU에 사용하던 HBM의 대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엔비디아는 AI 추론 전용으로 설계된 ‘루빈 CPX(AI 추론 전용 GPU)’에 GDDR7을 탑재하기로 했다.
내년에는 AI 관련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HBM은 물론 LPDDR5 및 GDDR7로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AI 추론 시장 확대와 스마트폰‧태블릿‧PC 등 기기 자체에 내장된 프로세서를 활용해 AI 연산을 수행하는 ‘온디바이스 AI’ 시장 성장으로, 강력한 그래픽 및 연산 능력을 자랑하는 GDDR7과 저전력으로 인해 배터리 효율성이 뛰어난 LPDDR5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지난 16일자 리포트에서 “내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 생산 증가율이 수요 증가율에 못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AI 메모리 수요가 HBM 중심에서 7세대 저전력 D램 LPDDR5X, GDDR7 등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GDDR7 수요 증가로 삼성전자 수혜 예상…영향력 확대하는 SK하이닉스, 엔비디아에 GDDR7 공급
김동원 연구원은 특히 GDDR7 수요 증가로 삼성전자의 직접적 수혜가 기대된다고 예상했다.
김 연구원은 “엔비디아는 삼성전자 1b D램(5세대 10나노급 D램) 기반의 GDDR7 모듈 채택을 확대할 전망”이라며 “이는 삼성의 GDDR(16Gb)이 엔비디아 RTX50 시리즈 GPU 탑재에 이어, RTX프로 6000 블랙웰에도 삼성 GDDR7(24Gb)이 탑재되고, 엔비디아가 중국 수요에 대비해 준비 중인 AI 가속기 B40과 2026년 루빈 CPX에도 삼성의 GDDR7 탑재가 유력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3분기 현재 GDDR7은 삼성전자 전체 그래픽 D램의 3분의 1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엔비디아는 삼성전자에 GDDR7 공급 확대를 대폭 요청하고 있어 향후 삼성전자는 평택 공장에 GDDR7 생산 능력을 기존 대비 두 배 이상 증설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나아가 “DDR5 대비 가격 프리미엄을 받고 있는 삼성의 GDDR7은 높은 수익성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돼, GDDR7 출하 확대는 향후 D램 사업의 수익성 개선을 견인할 전망”이라며 진단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는 엔비디아 GDDR7의 독점적 공급 지위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는 경쟁사들의 경우 1b D램의 생산 능력이 대부분 HBM3E에 할당돼 있어 엔비디아 요구에 적기 대응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HBM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60%가 넘는 점유율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GDDR 시장에선 삼성전자가 풍부한 생산 능력과 엔비디아와의 공급 관계를 기반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다만, 시장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2023년 SK하이닉스는 GDDR 시장 점유율 42.4%를 기록하며, 삼성전자(39.4%)를 제친 바 있다.
2020년 SK하이닉스의 GDDR 시장 점유율은 23.0%로 삼성전자(42.4%) 절반 수준에 그쳤으나, GDDR 분야에서도 기술력을 강화한 결과 2023년엔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HBM 경쟁에서의 열세를 GDDR7 시장 지배력으로 만회하겠다는 삼성전자와, 삼성전자에 이어 엔비디아 RTX 5070에 GDDR7 탑재시킨 SK하이닉스의 맹추격으로, GDDR 시장 경쟁도 한층 더 격화될 것이란 게 반도체 업계의 대체적 시각이다.
<사진=연합뉴스>
더퍼블릭 / 김영일 기자 kill0127@thepubl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