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퍼블릭=안은혜 기자] '사법부 독립' 문제는 6·3 대선에서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다. 헌정 사상 두 번째로 치러지는 조기 대선 국면에 유례 없는 입법부의 '사법부 흔들기'는 법조계,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의 비판의 중심에 서있다.
사법부가 정권을 견제하지 못하면 집권당의 '폭주'를 낳는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는 우려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한 나라에서 집권 세력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해 정권에 대한 견제 기능을 무력화한 사례는 종종 일어나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다. 베네수엘라는 지난 25일(현지시간) 실시한 총선·지방선거 투표율이 10%대로 추락했다. 사법부의 부정선거 옹호 판결에 유권자들의 선거 불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여당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인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하던 2004년에 대법관 수를 20명에서 32명으로 12명 늘리고, 12명 전원을 친정부 인사들로 채워 사법부를 장악했다. 이후 마두로 대통령은 2022년 대법관 수를 다시 20명으로 줄였지만, 친정권 대법관들 위주로 재임명했다.
베네수엘라는 포퓰리즘으로 국회 다수 의석을 장악한 행정부가 입법권을 활용해 사법부까지 장악하고, 사법부에 포진한 친정부 인사들이 판결로 집권 세력의 독재를 합법화하는 악순환 구도가 굳어진 상태다.
지난해 7월 극심한 경제난을 참지 못한 유권자들이 야당 대선 주자 에드문도 곤살레스 우루티아에게 많은 표를 주었지만 정부는 ‘마두로 승리’를 발표했다. 미국 등이 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대법원은 ‘선거에 문제가 없다’며 정권 연장을 승인하는 역할을 했다.
헝가리 역대 최장수 총리로 15년째 집권 중인 빅토르 오르반 정권은 헌법재판관을 8명에서 15명으로 늘린 뒤 집권당이었던 피데스당 단독으로 신규 헌법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해 헌재를 장악했다.
피데스당은 2023년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법을 통과시켜 정부 기관(국가사법청)에 판사 임명·징계권 등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헌법재판소의 법률 심사 권한을 제한했다.
유럽연합(EU)은 회원국 헝가리의 이같은 사법부 장악에 대해 "법치주의에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헝가리에 대한 보조금을 동결하는 등 제재에 나섰다. 하지만 오르반이 물러서지 않고 있어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멕시코는 내달 1일 세계 최초로 모든 법원의 판사를 국민 투표로 뽑는 '판사 직선제'가 실시된다. 지방선거와 같이 열리는 판사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대법관 9명을 포함해 법관 881명을 뽑게 된다.
1만8000여 명이 지원해 심사를 거쳐 3422명의 후보자가 추려졌는데, 이 중에는 마약 카르텔과 연루 의혹이 있는 인물도 있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올해 선거 대상 지역이 아닌 곳에 있는 법원의 판사에 대해선 2027년 선거가 치러진다.
멕시코 의회는 지난해 9월 대법관을 포함한 사법부 내 7000여명의 법관 전원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변경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열고 개헌안의 합헌성 여부를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개정된 헌법을 돌이키지 못했다. 전원합의체의 "사법부 독립성 감시 의무가 대법원에 있다"는 판단과 "입법부를 향한 쿠데타"라는 주장이 맞섰다.
이후 알프레도 구티에레스 오르티스 메나 대법관은 "대중의 지지에 의존하는 공직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고, 이후 여덟 명의 대법관이 잇달아 사임했다.
'판사 직선제'는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이 도입한 정책이다. 멕시코는 여당인 국가재건운동이 상원 128석 중 59석을, 하원 500석 중 201석으로 모두 압도적인 1당을 차지하고 있다. 국민투표를 할 경우 지지율이 높은 여당의 입맛에 맞는 대법관이 대거 당선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폴란드는 사법부 장악을 시도하다 유럽연합(EU) 퇴출 위기에 내몰렸다.
2015~2023년 여당이었던 법과정의당은 ‘사법 개혁’의 일환으로 판사 추천·임명권을 가진 국가사법위원회 구성원을 사법부가 아닌 정부가 ‘셀프 임명’하도록 개정했고, 대법원 산하에 판사 징계위원회를 설립해 정부에 반하는 판사들을 징계할 수 있도록 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친정부 성향 법관들로 교체하기도 했다. EU는 2017년 12월 폴란드 정부의 법치주의 훼손을 문제 삼고 지원금을 동결하며 제재에 나섰으며, 이후 폴란드를 EU 최고법원에 제소했다.
법과정의당의 사법 장악 시도는 2023년 12월 도날드 투스크 총리가 이끄는 시민연합의 총선 승리로 8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하면서 일단락됐다. 시민연합은 국가사법위원회 위원 임명 권한을 사법부로 복원하는 등 사법부 독립성 회복에 나섰다.
지난해 5월 EU는 "심각한 법치주의 위반의 위험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제재 절차를 해제했다. 하지만 2020년 재선에 성공한 법과정의당 출신 안제이 두다 대통령이 개혁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난항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2023년 사법부·입법부·행정부로 분산돼 있던 대법관 임명권을 여당이 대부분 가져오는 방식의 법원 개편안을 추진해 반발을 샀다. 대법원이 2024년 이를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네타냐후의 이른바 ‘사법 개혁’은 일단 무산됐다.
더퍼블릭 / 안은혜 기자 weme35@thepubl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