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위기에 몰린 여천NCC가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긴급 자금 수혈로 간신히 숨을 돌렸다.
당장의 불은 껐지만, 양대 주주 간 책임 공방은 오히려 격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일단 살리고 보자”는 한화와 “원인 규명 없는 지원은 밑 빠진 독”이라는 DL의 입장이 정면 충돌하면서, 경영 정상화의 길은 멀고도 험난해졌다.
특히 DL은 한화가 시장가보다 저렴하게 에틸렌을 가져가 여천NCC의 수익성을 갉아먹었은 것이 수익억 악화의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반면 한화는 오히려 DL이 저가 거래로 부당이익을 챙겨 국세청으로부터 1000억 원대 세금 추징을 받았다고 맞서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번 갈등이 단순한 주주 간 분쟁이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 전반의 위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부진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대형 합작사마저 유동성 위기에 휘말린 현실은 산업 경쟁력 전반에 ‘경고등’을 켠 셈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 주요 기업들도 생산라인을 멈추거나 구조조정에 나서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업계에서는 자율 구조조정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지난해 말 경쟁력 강화 대책을 내놨지만, 적극적인 사업 재편 로드맵은 포함되지 않았고 후속 조치도 더딘 상황이다.
한화·DL, 자금 지원 합의…여천NCC 유동성 위기 일단 봉합

최근 DL그룹이 한화그룹과의 합작사인 여천NCC에 긴급 자금을 투입하기로 하면서 부도 위기에 몰렸던 여천NCC는 이번 지원으로 일단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됐다.
1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DL케미칼은 지난 11일 긴급 이사회를 열고 2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승인했다고 공시했다.
DL도 같은 날 이사회를 열어 DL케미칼에 대한 1778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참여를 승인했다. DL케미칼은 유상증자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YNCC를 지원할 방침이다.
여천NCC는 1999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각사의 나프타분해설비를 통합해 공동 출자한 회사다. 양사가 지분을 50%씩 보유하고 있다.
여천NCC는 한때 1조원대 영업이익을 내기도 했지만, 중국발 공급과잉과 경기 침체 여파로 2021년 영업이익 3871억 원을 기록한 이후 3년째 적자를 이어왔다. 또 오는 21일로 예정된 수백억원 규모의 운영 자금을 결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이 때문에 공동 대주주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올 3월 1000억 원씩 출자하면서 1차 자금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공동 대주주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의견은 6월부터 갈리기 시작했다. 당시 여천NCC는 대주주들에게 각각 1500억 원씩 총 3000억 원의 2차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한화그룹이 즉각 자금 마련에 나선 것과 달리, DL그룹은 여천NCC의 지속 경영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금 지원에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3개월 만에 추가 지원을 요청한 만큼 여천NCC의 유동성 위기 원인이 무엇인지 경영 상황부터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특히 DL그룹 내부에선 여천NCC의 워크아웃도 불사해야 있다는 강경 의견도 있었지만, 석유화학업계의 연쇄 부도 우려 목소리가 커지자 결국 자금 지원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이후 DL측은 한화와 공동 운영 중인 TFT를 통해 경영 실태를 면밀히 분석하고, 경쟁력 강화와 자생력 확보를 위한 실행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0억 지원에도 시끌…DL·한화, 여천NCC 부실 원인 놓고 ‘진실게임’

DL이 지원에 나서면서 당장의 유동성 위기는 해소됐지만, 한화와 DL은 여전히 책임 소재를 두고 맞불을 놓는 ‘네 탓’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DL은 ‘묻지마 지원’에 대해 여전한 불신감을 보이고 있다. DL은 입장문을 통해 "묻지마 증자 요청이 반복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지원하는 것이 주주와 경영진으로서 올바른 판단인지 의문"이라면서 "유상증자를 승인했지만 여천NCC 부실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 분석과 해결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즉 제대로된 원인 분석없는 '밑빠진 독에 물뭇기식' 지원에 선을 긋겠다는 의지다.
DL은 여천NCC 경영 악화의 원인 중 하나로 한화의 원가 구조를 지목하고 있다. 여천NCC가 생산하는 에틸렌의 약 70%를 한화가 가져가는데, 이 과정에서 과도한 할인 판매가 이뤄져 한화는 연간 수백억 원의 원가 절감 효과를 누리는 반면, 여천NCC의 수익성은 그만큼 악화됐다는 게 DL의 주장이다.
DL은 “한화가 원료가 협상에서 자사 이익만을 고집해 여천NCC의 에틸렌 가격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며 “하방 가격 기준 설정과 장기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원료 공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화는 DL의 유상증자 결정에도 불구하고, 자금 용도가 운영자금으로만 명시돼 있어 실제로 여천NCC에 투입될지 불확실하다고 지적했다.
여천NCC 지원이 이뤄지려면 DL케미칼의 자금 지원 이사회 결의뿐 아니라 합작사인 여천NCC 이사회에서 주주사 차입 결의를 거쳐야 하지만, 아직 이러한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화는 또 DL이 이번 지원과 관련해 자사와 어떠한 협의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아울러 한화는 원료공급 계약과 관련해서도, DL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DL이 과거 저가 거래로 여천NCC에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는 것이 한화의 주장이다.
한화는 올해 초 여천NCC가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에틸렌 등을 시세보다 낮게 판매해 총 1006억 원의 법인세를 추징당한적이 있는데, 이 중 962억 원(96%)이 DL그룹과의 거래에서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한화 거래분은 44억 원(4%)에 불과하며, 국세청은 DL이 부당한 이익을 챙긴 것으로 보고 법인세를 부과했다는 것이다.
품목별로 보면 에틸렌은 DL과 한화 모두 공급받는 제품이지만 국세청은 한화 거래가격을 시가로 인정한 반면 DL에는 더 낮은 가격이 적용돼 법인세 부과 사유가 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화는 “국세청은 시장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거래해 DL이 부당 이익을 취한 것으로 보고 법인세 추징액을 부과했다”면서 “향후 불공정한 거래 조건에 따른 부당이득을 방지해 과세 처분, 불공정거래 조사 등으로 인한 법위반 리스크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DL은 곧바로 “당시 세무조사도 대법원 판결로 문제 없음으로 결론났다"며 맞받았고, "2007년과 2025년 세무조사는 과세 대상이나 과세 결과 등이 별개"라 재차 반박하면서, 양측의 공방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여천NCC 사태, 석유화학 구조위기의 축소판...정부 역할론 대두
이처럼 회사 경영을 두고 공동 대주주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경영 정상화에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업계는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양측이 지분을 절반씩 나눠 가진 합작 구조 때문에 의사 결정이 쉽게 막히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두 대주주가 힘을 반씩 쥔 구조라, 큰돈을 쓰거나 중요한 계약 조건을 바꾸려 할 때 서로 거부권을 쓰면 일이 쉽게 막힌다. 게다가 두 회사가 모두 주요 고객이다 보니 가격 책정이나 정산 방식에서 이해가 자주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이런 문제를 풀려면 외부 기준을 적용해 가격을 정하거나, 중립적인 위원회·전문가가 결정을 내리는 장치, 일정 주기마다 조건을 새로 조정하는 규정을 두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업계에서는 이번 여천NCC 사태가. 단순한 주주 간 힘겨루기가 아닌, 국내 석유화학업계 전반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의 축소판으로 보기도 한다.
글로벌 공급과잉과 수요 부진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대형 합작사조차 자금난에 허덕이며 존립 위기에 몰린 상황은 산업 경쟁력 전반에 경고등을 켠 셈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LG화학의 경우 대산·여수 공장의 스티렌모노머(SM)와 나주 공장의 알코올 생산을 멈췄고, 롯데케미칼도 여수 2공장의 일부 라인을 가동 중단했다.
롯데케미칼은 HD현대오일뱅크와 대산 NCC 설비 통합 운영을 논의 중이며, 에틸렌 스프레드가 장기간 손익분기점(250달러) 밑돌면서 업계 전반의 적자가 이어지고 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누적돼 온 중국발 공급 과잉 여파로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한계치에 다다른 모습이다.
이들 기업들은 일부 소규모 생산시설을 철거하는 등 자율 구조조정을 시도하고 있으나 업계 자율로는 현재 난국을 헤쳐나가기 어렵다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이에 석유화학업계에서는 하루빨리 정부의 지원이나 구조조정안이 나올 필요성이 크다는 목소리가 많다.
물론 정부는 지난해 말 석유화학 경쟁력 강화 대책을 내놓았지만 적극적인 사업 재편 방안은 담기지 않았다. 결국 대선 기간 중 지원을 약속한 이재명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 상황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단순히 긴급 자금을 투입하는 처방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정부 주도의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과 함께 원가 절감, 설비 효율화 등 근본적인 정상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퍼블릭 / 홍찬영 기자 chanyeong8411@thepubl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