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2편 (21년 12월 25일자)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2편 (21년 12월 25일자)

  • 기자명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 입력 2021.12.2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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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신라는 4대정책을 추진해 해륙국가를 만들고 통일에 성공한 4개 정책에 대한 설명과 해설

▲ 21년 12월 25일자,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2편 (출처=유튜브)

[더퍼블릭 =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211225일자,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2편에서는 약소국 신라는 4대정책을 추진해 해륙국가를 만들고 통일에 성공이라는 내용의 이다. 아래는 유튜브 해설 영상의 주요 내용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2편, 영상 강좌 주요 내용]

신라는 국력이 가장 미약했고, 국가생존에 전력을 기울인 국가였으므로 실제적인 통일 사업에 주력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본고는 그 가운데에서 몇 가지를 선택하여 앞글에서 전개한 논리와 연관시켜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국토질서 재편전략이다.

내부 통일을 위한 교통망의 확충과 거점 도시의 육성이다. 경제생활의 향상과 영토의 확장 및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관리체제의 일원화가 필요했다. 국제적으로 교류하고 무역 번성, 그리고 효율적인 방어가 필요했다. 따라서 육지영토 뿐만 아니라 해양영토의 확장이 필요했다. 

 

김이사부의 주도 아래 지증왕부터 진흥왕 시대까지 동해안의 삼척, 강릉, 김해, 화성, 충주 등의 항구도시와 서울의 북한산 지역 및 강화도를 확보했다. 남양만의 당성확보는 신라의 생존은 물론 통일사업의 근본필요조건이었다. 남양(화성) 지역은 진흥왕이 2차 나제동맹을 깨고 장악하므로써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항구를 처음 확보한 것이다.

두 번째는 신앙과 사상의 통일이다.

지증왕 시대에 국명을 ‘신라(德業日新 網羅四方)’로 변경하였고, 법흥왕은 새로운 사상이면서 종교인 불교를 공인하였다. 강력한 조직과 치밀한 논리체계, 선진국의 문물을 배경으로 한 불교는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법흥왕, 진흥왕, 마야부인 등의 명칭은 부처와 왕가를 동일하려는 종교정책의 일환이었다.

세 번째는 종교와 정파를 초월한 인재의 양성과 역할이다.

불교를 전통종교와 습합시키는데 성공하여 많은 주도세력들이 화랑도의 일원이 됐다. 김춘추를 비롯한 신흥 정치세력, 김유신을 필두로 한 가야계 무장들은 화랑도의 구성원이었다. 또한 원광 자장 의상 등의 승려들과 대당 유학승 등은 통일실현의 일선에서 활약했으며, 토일 후에는 원효 혜공 명랑 등이 통일의 후유증인 분열과 증오심을 해소했다.

네 번째는 상징물의 건립 등을 통한 ‘통일비전’의 제시와 홍보활동이다.

진흥왕에 이어 선덕영왕은 황룡사와 함께 9층탑을 세웠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신라 중심론’과 ‘불교역할론’을 국내외적으로 선언하였다. 훗날 통일을 완성한 후에 불국사의 창건과 석굴암의 조영은 새로운 세계의 완성을 국내외에 선언하는 행위였다.
 


윤명철 교수 / ymc04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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