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고구려에는 수도 마다, 시조묘(주몽) 모신 용산(용의 머리)이 있었다'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고구려에는 수도 마다, 시조묘(주몽) 모신 용산(용의 머리)이 있었다'

  • 기자명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 입력 2022.04.1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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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죽음은 용산과 관련있다. 만주 환인 지역(첫번째 수도)의 용산, 만주 국내성(2번째 수도)의 용산, 평양 지역(3번째 수도)의 용산...현재 서울 한강가의 용산은 고려시대부터 명칭이 나타난다. 풍수로 볼 때 용머리에 해당된다고 판단했기 때문

▲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고구려에는 수도마다, 시조묘(주몽) 모신 용산(용의 머리)이 있었다.

(22년 4월 12일자) (출처=유튜브)

[더퍼블릭 =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윤명철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가 유튜브 ‘역사대학’에서 ‘고구려의 수도마다, 시조묘(주몽) 모신 용산이 있었다’를 4월 12일자 업데이트 하였다.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2022년 4월 12자 주요 내용]


현재 서울 한강가의 용산은 고려시대부터 명칭이 나타난다. 풍수로 볼 때 용머리에 해당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후기에는 용산호가 둑이 무너지면서 한강과 이어져서 용산강으로 변했고, 그때부터 조선 중기 이후까지는 서울의 가장 큰 항구로 사용됐다.

주몽의 죽음은 용산과 관련있다.

그런데 용산은 고구려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건국자인 주몽(추모)는 용으로 표현됐고, 그를 장사지낸 장소는 용산이다. 주몽이 죽는 상황을 광개토태왕릉비문은 “하늘은 황룡을 아래로 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딛고 하늘로 오르시었다.”(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라고 기록하였다. 결국 해모수의 하강, 주몽의 승천 등이 이루어진 공간은 의미상으로는 동쪽 언덕에 있는 용산 지역에 해당한다.

주몽의 무덤은 龍山과 관계가 깊다는 기록들은 그 밖에도 많다. 삼국사기에는 임금이 40세에 승하했는데, 용산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안의 동명왕편에는 임금이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아 유리와 신하들이 옥채찍을 대신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했고, 제왕운기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기록했다.

평양 지역(3번째 수도)의 용산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에는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는 동명왕묘가 용산에 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필자가 방문한 진파리 고분군에는 현재 ‘전동명왕릉’으로 불리우는 진파리 10호분인 진주묘가 있다. 무덤 옆에는 전시관이 있어서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또 동명왕릉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공터에는 정릉사터가 발굴된 후에 복원됐다.

만주 국내성(2번째 수도)의 용산

이렇게 마지막 수도인 평양지역에도 시조묘가 있다면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에는 용산이 있고, 주몽의 무덤이 있어야만 한다. 가능성이 큰 무덤은 장군총이다. 필자는 장군총이 용산 아래에 있다는 위치 뿐 만 아니라 형태와 구조, 수리 등을 고려해서 시조묘 또는 신전으로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집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집안현지』에도 장군총을 동명성왕묘(--在城北十五里山勢莊嚴可觀前有東明聖王墓俗稱將軍墳--)로 기록하였다. 물론 장군총이 있는 뒷산의 이름은 지금도 용산이다.

만주 환인 지역(첫번째 수도)의 용산

그렇다면 첫 번째 수도에는 당연히 시조묘가 있어야하고, 그것은 모든 시조묘 또는 사당의 원형(原形)이었을 것이다. 신대왕은 167년에 국내성을 떠나 졸(홀)본에 있는 시조 사당에 다녀왔다. 고구려의 임금들은 심지어는 수도를 평양지역으로 옮긴 후에도 즉위한 다음 해 또는 그 다음 해에 졸(홀)본의 시조사당을 참배했다. 요동성처럼 큰 성 안에는 고등신과 부여신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놓았다. 필자는 일찍부터 환인 지역과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수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환인 지역에 용산과 시조묘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반면에 중국인들, 일본인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환인의 오녀산성을 첫 수도인 홀본으로 규정한다. 일부 중국인들은 근래에 발굴한 환인의 망강루 고분군 가운데 제 6호분을 시조묘라고 보기도 한다. 또 오녀산을 용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인들은 시조인 주몽을 황룡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주몽의 무덤이 용산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려준다. 일반적으로 용은 중국의 황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용신앙’은 요서 지역의 사해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용 형태의 돌무더기처럼 이미 7,000~6,000년 전부터 있었다. 고구려도 임금을 용으로 인식하는 신앙과 정치사상이 있었고, 이를 계승한 조선의 왕들도 ‘용상’ ‘용포’ ‘용안‘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용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윤명철 교수 / ymc04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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