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개 분리 기준’ 나온 노란봉투법…기업들 “8500곳 하청과 개별교섭 악몽”
교섭창구 단일화 사실상 무력화…재계 “노사 협상 1년 내내 반복될 것” 현대차·조선·건설업 직격탄…민주노총·한국노총 영향력 확대 전망
[더퍼블릭=오두환 기자] 정부가 내년 3월 시행되는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의 시행령을 입법예고하면서 산업계 전반에 교섭 불확실성이 급격히 확산하고 있다.
정부는 하청 노동자의 실질 교섭권 보장을 내세웠지만, 교섭 단위 분리를 대폭 확대하면서 사실상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의 근간이 흔들렸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특히 수천 개 하청업체와 얽힌 국내 제조업 구조상 원청 기업의 교섭 부담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제조업 전반의 노무 리스크가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지난 24일 고용노동부 주도로 노란봉투법 시행령 개정안을 공개하고 내년 1월 5일까지 의견을 받는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하청 노동자의 교섭권을 보장하면서도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교섭 틀을 설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재계는 대규모 교섭 단위 분리가 현실화될 경우 노사 협상이 상시화되고 생산 차질 위험이 커질 것이라며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청 수천 곳과 ‘개별 교섭’ 가능성…창구 단일화 사실상 무력화
개정안에서 가장 큰 변화는 교섭 단위 분리 기준의 대폭 확대다. 기존 노동조합법은 근로조건의 현격한 차이, 고용형태, 교섭 관행 등 세 가지 예외적 사유가 있을 때만 노동위원회가 교섭 단위를 분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시행령은 이를 업무의 성질·내용·작업 방식, 임금체계, 노동 강도 등 31가지로 세분화해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에 교섭 단위 분리가 가능하도록 열어놓았다.
이로 인해 그동안 원·하청 노조의 창구 단일화를 전제로 운영돼온 교섭 체계는 근본적인 흔들림에 직면하게 됐다.
전문가들은 하청업체별로 노조의 요구가 다른 경우 분리 요구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교섭 단위 분리의 문턱을 지나치게 낮추면서 교섭창구 단일화는 형식적 제도에 그칠 것”이라며 “기업은 사실상 1년 내내 개별 교섭에 시달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최대 완성차 업계인 현대차는 현재 1·2·3차 협력사를 포함해 약 8500개 협력사를 두고 있다. 조선업의 경우 사내 하청 비율이 63%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일부라도 교섭 단위 분리를 신청하면 원청 기업은 수백, 수천 개의 교섭 테이블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한 노무 관계자는 “교섭 단위가 하나라도 흔들리면 생산라인 운영 자체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며 “교섭 분리 규정 확대는 대기업일수록 충격이 크다”고 말했다.
원청 내부 복수노조까지 분리 가능…협상 지형 복잡해져
교섭 단위 분리는 하청 노조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시행령은 “기존 교섭 단위 유지 시 노조 간 갈등 우려가 있거나 노사관계 왜곡 가능성이 있는 경우”도 분리 사유로 포함했다.
이에 따라 원청 내부 복수노조 역시 각각의 교섭 단위를 요구할 수 있게 돼 교섭 구조는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노조의 교섭력이 약한 중소 하청업체들은 이번 시행령을 계기로 양대 노총 가입을 확대할 가능성도 높다. 교섭 단위가 세분화될수록 전문적 교섭 전략이 필요해지고,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상급단체의 영향력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하청업체 노조는 독자적인 협상이 어렵기 때문에 상급단체 의존도가 커질 것”이라며 “이는 결국 원청 전체의 교섭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부 김영훈 장관의 ‘사용자성 판단’ 발언도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김 장관은 “교섭 의제 중 어느 하나라도 인정되면 사용자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이는 하청 노조가 산업안전이나 교육·훈련 등 사용자성 인정 가능성이 높은 항목 하나만 제시해도 원청을 교섭 대상으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교섭 테이블에 앉는 순간 협상 의무가 발생하고, 교섭 결렬 시 파업 등 단체행동 위험이 커지는 구조다.
산업계 “교섭 리스크 국가 단위로 증가”…외투기업 이탈 가능성도
재계는 이번 시행령이 기존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사실상 형해화한다고 비판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교섭 단위 분리 기준을 무분별하게 확대할 경우 노사 협상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이 크게 저하될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전문가들 역시 이번 시행령이 단기적으로 노동계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한 측면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 경영환경 악화와 외국인 투자 위축 가능성을 키울 것이라고 분석한다.
홍기용 인천대 교수는 “교섭 단위가 지나치게 쪼개지면 노사 충돌이 연중 반복될 수 있다”며 “외국계 기업 입장에서는 한국이 ‘노동 불확실성이 높은 국가’라는 인식이 강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사용자성 판단 지침과 사용자성 판단 지원위원회를 신설해 분쟁 과정에서 조언을 제공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들 조치가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효성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안이 노동위원회와 법원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노사 모두 부담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노사제도 안정화보다는 노동계의 요구에 더 초점을 맞춘 설계”라는 지적도 나온다. 교섭 구조가 복잡해지면 교섭 비용·시간·법률 리스크가 모두 증가하고, 이는 생산·가동·투자 계획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번 시행령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할지는 내년 교섭 시즌 이후 가시화될 전망이다.
다만 재계와 전문가들은 “교섭 구조가 지나치게 세분화될 경우 산업 현장의 충격은 예상보다 클 수 있다”며 “정부가 제도 운영 과정에서 충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