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빅3 추락, 피그스 역전… '재정 모범생' 자리 뒤바꼈다

IMF "2년 뒤 영·프·독 정부 부채, 남유럽 5개국 평균 웃돌 것" 중등 기술 의존·복지 확대·방위비 부담이 부채 구조 악화 피그스, 구조 개혁으로 체질 개선… "개혁의 배당금" 현실화

2025-10-20     양원모 기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더퍼블릭=양원모 기자] 유럽의 경제 지형이 10여 년 만에 뒤집히고 있다. 2010년대 초 재정 위기의 진원지였던 남유럽 국가들이 구조 개혁을 통해 부채를 줄이고 있는 반면, 유럽의 핵심 경제국으로 불린 독일·프랑스·영국은 저성장과 재정 불안의 늪에 빠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5일(이하 현지 시각) 발표한 재정 점검 보고서(Fiscal Monitor)에서 "2년 뒤인 2027년 유럽 빅3(영국·프랑스·독일)의 정부 부채 비율이 남유럽 5개국(PIIGS, 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이하 피그스)을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IMF에 따르면 빅3의 올해 국내 총생산(GDP) 대비 일반 정부 부채 비율은 평균 94.8%로, 2015년(84.7%)보다 10.1%p 증가했다. 반면 피그스의 평균 부채 비율은 같은 기간 124.3%에서 101.6%로 22.7%p 하락했다. IMF는 "2027년 빅3의 평균 부채 비율이 98.4%로 상승해 피그스 평균(97.7%)을 웃돌 것"이라고 분석했다.

'빅3 맏형' 영국은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재정 지출을 급격히 늘리며 지난해 부채 비율이 100.4%까지 높아졌다. 브렉시트 이후 성장률 둔화가 이어지면서 재정 기반이 약화됐다는 평가다. 반면, 포르투갈은 강도 높은 긴축과 구조 개혁, 관광 및 부동산 경기 회복에 힘입어 같은 해 부채 비율을 97.7%로 낮췄다. IMF는 포르투갈이 2030년 부채 비율을 75.8%까지 줄여 독일(74.8%)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스의 개선 속도도 두드러진다. 한때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210%에 달했던 그리스는 올해 말 142.2%까지 낮아질 전망이다. IMF는 2029년 말 그리스의 부채 비율이 130.2%로 떨어져 G7 평균(132.9%)보다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대로 프랑스의 재정 신뢰도는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신용 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17일 프랑스의 국가 신용 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내렸다. 프랑스 정부가 재정 지출 절감을 위해 추진하던 연금 개혁을 보류하면서 재정 관리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판단이다.

유럽 빅3의 침체는 단순한 경기 부진을 넘어 산업 구조 문제로 번지고 있다. 자동차, 공업 기계, 화학, 통신 등 중등 기술 분야에 집중한 결과, IT·소프트웨어·바이오 등 첨단 산업 경쟁력을 잃었다는 지적이다. 독일·프랑스·영국의 지난해 대중 수출은 전년 대비 9% 감소해 3년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

에너지 의존도 역시 구조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독일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끊기며 마이너스 성장에 빠졌다. 2023년 성장률은 -0.2%, 올해는 0.2%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프랑스와 영국도 각각 0.7%, 1.3% 성장 전망에 그친다.

고령화로 복지 부담이 늘어나는 가운데 방위비, 녹색 전환 비용 등 새로운 지출 요인이 겹치며 재정 압박은 커지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의 국가 채무는 이미 GDP를 넘어섰고, 복지 축소에 대한 국민 반발로 재정 개혁은 번번이 좌초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피그스 국가들은 위기를 계기로 체질을 바꿨다. 구제금융을 받으며 공공 부문 임금과 연금을 삭감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한 결과, 경쟁력이 회복됐다. 그리스는 최저 임금 삭감과 산별 교섭 제한 등으로 단기 충격을 겪었지만, 관광과 수출이 살아나며 2013년 27.8%였던 실업률이 올해 상반기 8.9%로 떨어졌다.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아일랜드도 공무원 감축, 세제 개편, 감세 전환 등 구조 개혁을 지속해 재정 건전성을 높였다.

전문가들은 "피그스는 고통스러운 긴축을 통해 개혁의 배당금을 받고 있지만, 유럽 빅3는 여전히 개혁을 미루고 있다"고 지적한다. 0%대 저성장의 늪에 갇힌 한국 역시 개혁 지연의 비용을 치르고 있는 유럽의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