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마다 빅딜”…두산, SK실트론 품어 제2 도약 시도
[더퍼블릭=오두환 기자] 127년 역사를 지닌 두산그룹은 늘 위기 때마다 대형 인수합병(M&A)으로 체질을 바꿔왔다.
2009년 오비맥주 매각은 그룹이 유통업에서 벗어나 중공업 중심으로 탈바꿈하는 전환점이었다. 2007년에는 미국 건설기계업체 밥캣을 인수하며 글로벌 건설장비 시장에 진출했다. 이 같은 ‘빅딜’은 자본시장에서 두산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룹의 핵심 사업인 두산에너빌리티(원전·화력 기자재)와 두산밥캣(건설기계)은 경기·정책 변수에 크게 흔들린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당시 두산에너빌리티는 신규 원전 수주가 끊기며 직격탄을 맞았다. 코로나19 시기에는 건설경기 침체로 밥캣 매출이 급감했다. 이 때문에 두산은 유동성 위기에 몰려 자산 매각과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원전 정책이 일부 되살아나고, 북미·유럽 지역의 건설장비 수요가 살아나면서 두산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룹 내부에서는 여전히 “정부 정책과 경기 흐름에 따라 사업 기반이 흔들린다”는 불안이 제기됐다.
두산이 반도체라는 새로운 먹거리를 본격적으로 검토한 배경이다.
SK실트론 인수, 반도체 밸류체인 완성
두산이 눈을 돌린 곳은 세계 3위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 SK실트론이다. SK그룹은 최근 사업 구조 재편 차원에서 SK㈜가 보유한 SK실트론 지분 70.6%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29.4%는 매각 대상에서 제외됐다.
SK그룹 관계자는 “협의 중인 것이 맞다”고 인정했다. 두산은 “확인 불가”라는 입장을 내놨지만, 업계에서는 유력한 협상 상대가 두산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SK실트론은 12인치(300㎜) 웨이퍼를 주력으로 생산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 3위다. 웨이퍼는 반도체 생산의 기초 소재로, 엔비디아·TSMC 등 글로벌 빅테크의 공급망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제품이다.
최근 AI 가속기와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웨이퍼 산업은 장치산업 중에서도 성장성이 주목받는다.
두산은 이미 반도체 사업 기반을 마련해왔다. 2022년에는 국내 1위 반도체 후공정 테스트 기업 테스나(현 두산테스나)를 4600억원에 인수했다. 또 ㈜두산 전자BG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기판용 동박적층판(CCL)은 엔비디아 AI 반도체 패키징에 쓰이며 최근 실적이 급격히 개선됐다.
SK실트론 인수에 성공하면 두산은 웨이퍼(SK실트론), 기판(전자BG), 테스트(두산테스나)로 이어지는 ‘소재–기판–후공정’ 밸류체인을 완성하게 된다.
특히 그룹에서는 박정원 회장의 장남인 박상수 수석(전 증권사 반도체 애널리스트)이 반도체 확장을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대교체와 신성장동력 확보가 맞물리면서 “두산이 반도체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려는 큰 그림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자금·규제 정지작업 끝낸 두산
인수자금 조달도 사실상 윤곽이 드러났다. 두산은 올해 2분기까지 두산로보틱스·두산에너빌리티 지분을 담보로 한 대출과 일반 신용대출로 약 1조원을 확보했다. 여기에 보유 현금성 자산과 단기금융상품 1조2000억원을 더하면 인수 대금 충당이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SK실트론의 전체 기업가치는 5조원 안팎으로 평가되지만, 순차입금(3조원)을 제외하면 지분 가치는 약 2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두산이 최근 지주사 지위를 포기한 것도 주목된다. 지주사 규제에서 벗어나면서 부채비율(200% 이내 유지 의무)과 자·손자회사 지분 보유 제한에서 자유로워졌다. 재무구조를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어 대형 M&A를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SK그룹 입장에서도 두산은 ‘적합한 매수자’다. 사모펀드에 매각할 경우 단기 차익 실현을 위한 재매각 가능성이 크고, 규제 당국과 임직원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반면 두산은 장기 투자가 가능한 대기업으로, 웨이퍼 산업에 필요한 연간 1조원 안팎의 시설투자 부담도 감당할 수 있다. SK와 두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는 얘기다.
다만 변수도 있다. 반도체 산업은 막대한 투자와 높은 기술 장벽이 특징이다. 글로벌 반도체 사이클에 따라 실적 변동성이 크다는 점에서 두산이 리스크를 안게 될 가능성도 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정책 변화에 취약했던 것처럼, SK실트론 역시 글로벌 업황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SK실트론 인수가 성사되면 두산은 원전·건설기계라는 전통 주력에 더해 반도체라는 미래 성장축을 갖추게 된다”며 “127년 두산의 역사에서 또 한 번의 빅딜이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