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선불’ 요구에 與 “귀신 씻나락”… 대미 협상 험로

강경 대응, 협상판에 독 될 수도

2025-09-29     오두환 기자
지난 8월 25일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퍼블릭=오두환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대미 투자 3천500억달러(약 490조원)를 “선불(up front)”이라고 못박자, 더불어민주당 내 강성 친명(親이재명)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외교가에서는 “국내 정치용 반미 메시지가 되레 미국의 강경 대응을 자극해 협상을 더 꼬이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제기된다.

트럼프 “韓 3,500억 달러, 그것은 선불”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5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중국 틱톡 합의 관련 행정명령 서명 뒤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과거 다른 나라들로부터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잘하고 있다”며 무역 성과를 강조했다.

그는 “무역 합의 덕분에 한 사례에서는 9천500억달러를 확보했다. 일본에서는 5천500억달러, 한국에서는 3천500억달러를 받는다. 그것은 선불(up front)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 7월 한미 무역협상에서 합의한 ‘한국의 3천500억달러 대미 투자’가 미국의 관세 인하 조건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못박은 것이다. 당시 협상에서 미국은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 측이 대규모 투자 패키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문제는 투자 방식이다. 한국은 보증을 통한 간접 투자를 선호하는 반면, 미국은 일본식 현금 지분 투자 방식을 요구하며 투자 이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안을 내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친명계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더불어민주당 내 강경 친명계 모임인 ‘더민주전국혁신회의’는 27일 논평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 발언을 직격했다. 이들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정도가 있다”며 “무도한 관세 협상으로 국민주권을 훼손하는 미국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 정부 주장대로 현금 직접 투자 방식이 이행된다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곧장 바닥을 드러내 IMF에 손을 벌려야 하는 ‘제2의 외환위기’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정부는 트럼프 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절대 수용해서는 안 된다”며 “미국·일본과 무제한 통화스와프 등 통화 안전장치를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앞서 외신 인터뷰에서 “(통화스와프 없이) 전액 현금 투자 방식으로 가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청와대·외교안보 라인은 ‘관리 모드’

반면 청와대와 외교안보 라인은 강경 일변도 대응을 자제하는 모습이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3천500억달러는 객관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범위”라며 “대안을 갖고 협의하고 있다”고 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도 AP통신 인터뷰에서 미국을 직접 비난하기보다 최근 조지아주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와 관련해 “(비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하며 신중한 톤을 유지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3500억달러 투자와 관련해 무제한 통화스와프와 상업적 합리성 확보가 마지노선”이라는 기류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강경 발언으로 국내 여론을 결집시키면서도 실질 협상에서는 출구를 열어두려는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연합뉴스]

 

야당 “동맹 흔들지 말라”

국민의힘은 공식적으론 말을 아끼면서도, 민주당의 강경 공세를 ‘반미 정치’로 규정하며 비판했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경제주권 수호는 명분이지만, 미국을 적으로 돌려 얻을 게 무엇이냐”며 “동맹 균열이 아니라 실리 외교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트럼프가 조건을 분명히 밝힌 만큼 협상판이 더 명확해졌다”며 오히려 협상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가 “혹 떼려다 혹 붙일라”

외교가에서는 민주당의 강경 노선이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한 외교 소식통은 “국내 여론을 협상 지렛대로 쓰는 것도 방법이지만, 상대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며 “혹 떼려다 더 큰 혹을 달 수 있다”고 했다.

반미 여론이 커질 경우 트럼프 행정부가 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거나 새로운 요구 조건을 꺼낼 명분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당의 ‘경제주권 수호’ 명분과 외교 실리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느냐가 향후 한미 협상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친명계의 강성 메시지가 국내 정치 결집에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협상판에선 독(毒)이 될 위험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