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조선인민군의 숨겨진 이야기(2)

[분석]조선인민군의 숨겨진 이야기(2)

  • 기자명 김덕환
  • 입력 2016.12.2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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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번째 이야기

- 조선인민군의 두번쨰 이야기


C. 북한군으로 편입된 연안파



* 편의상, 연안파로 서술하였으나, 정치적 집합성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 연안계로 보아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연안파는 화북조선독립동맹 및 그 동맹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과 중국 공산당군(팔로군, 신사군)등에 활약하던 조선인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1938년 설립된 김원봉에 의해 설립된 조선의용대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주로 첩보활동 및 후방교란작전을 주임무로 하였다. 이에, 중국 화북지역에 있던 부대원들이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요구하며 의용대에서 이탈, 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을 지도자로 1941년 조선의용군을 창설하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 팔로군 포병사령관이었던 무정이 사령관을, 후일 북한 내무상이 되는 박일우가 정치위원을, 한국전쟁당시 휴전회담의 북측 대표였던 이상조 등이 지휘부를 이루었다. 조선의용군은 창설당시 300여명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을 상대로 실제 전투에 투입되었고, 주로 일본군에서 탈영한 조선인들로 병력 과 무장을 보충하였고, 전쟁말에는 30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되기도 한다.




이외도 중국 공산당군에 편입된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어떤 이들(예:무정)은 모택동과 함께 대장정을 하기도하고, 조선의용대의 좌파중에 연안으로 합류하거나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일부(방호산, 김창덕, 이권무 등) 등이었다. 그들은 중국인들에 비해 소수였으나 주목받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소수민족들에 비해 우수한 전과를 보였고, 이는 높은 항일의식을 가지고 임무에 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모택동과 등소평 등은 조선인부대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중국공산당내 조선인들은 중국이 해방된 다음, 조선이 해방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국공내전시기 가장 용맹했다고 평가받았던 임표휘하 부대 중 조선인들로 구성된 164사단과 166사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호산(추정)




해방후, 이들은 국공내전에 우선적으로 참여하여 빨치산파와 소련파에 정치적 군사적 지도권을 상실하지만, 한국전시기, 매우 놀라운 전과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전당시,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이다.



조선의용군 중 일부는 1945년 9월 국내에 진입하려가 소련군에 의해 신의주에서 무장해제 당하였다. 당시, 소련 조선군사령부는 이러한 중국 공산당계열의 진입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소련이 중국 공산당을 신뢰하지 않았고, 소련이 아닌 다른 외국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 조선반도내에 세력화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 소련의 스탈린은 2차대전 기간중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지했고, 중국 공산당 모택동을 가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였다.



조선의용군 중 상당수는 정치군사조직의 일원이 아닌 개인신분으로 북한에 돌아갔으나 지휘부들은 당시, 격화되었던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



이들 연안파들은 비록, 북한내에서 환영받지 못했지만, 이들이 경험한 중국에서의 전투경험은 북한군이 한국전쟁에서 한미연합군에 타격을 주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특히, 북한군이 해방후, 짧은 시기에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산들이었다.


이들 연안파들의 간부는 일반적으로 빨치산파 보다 높은 사회적 배경과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시기, 비정규전과 정규전을 모두 경험하고 포병전력을 대규모 실전에서 활용해본 세력이기에 이들이 북한군 창설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름


당 시 직 책


후일 직책


비 고


무 정


민족보위상 차수(1946-1950)


건강상 사망


(망명자 증언)


중국 공산당 팔로군 포병사령관


박일우


내무상(1946-1952)


조중연합군 부사령관


숙 청



김 웅


전선사령관(1951)




방호산


6사단장(1950)


군단장


공화국 이중영웅



경영자로 숙청(추정)


이권무


사단장, 군단장(1950)


공화국 이중영웅



김창덕


군단장(1950)




이상조


장령, 정전회담 대표(1951)


소련주재 북한대사


소련망명


정치학박사


한국 방문


왕 연


항공사단장,


공군사령관(1950)




[ 연안파 계열의 주요 인물 직책]




D. 소련파



소련파는 대부분 소련내 거주하던 이민자들의 후손이다. 19세기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1910년대 말에는 그 수가 20여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들중 일부는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가담하였는데, 1918년 이들이 세운 조선공산당은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공산당 조직이었다. 그러나, 1937년 20여만이상의 조선인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였다. 스탈린은 조선인들이 향후, 있을 일소전쟁에서 소련이 아닌 일본편을 들까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강제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다.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땅에서 조선인들은 살아남았고, 이들은 간척사업을 통해 다시 땅을 가질 수 있었다. 해방후, 이들중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해방후, 소련군정사령부에서 실무자로 근무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람은 허가이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소련시민이었고, 이로인해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북한에서 나고 자란 조선인들에 대한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이당시, 북한내 지역인들에게 지지를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항일전력이 필요한데 이들에게는 그것이 없었고, 소련군입장에서도 소련파에서 소련군사령부의 지침을 잘 실천할 실무자가 필요했지,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이들은 허가이의 사망이후, 역사속에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였다.



■ 특이경력의 두 군인: 남일과 김상겸



소련파로 알려진 남일은 매우 특이한 경력의 군인이다. 남일은 1913년 태생으로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 중의 한명이다. 그는 타슈켄트 사범대학에 졸업하고, 1941년 독일의 소련침공 이후, 소련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42년 소련군 대위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하였고, 1943년 역사상 최대인 대규모 기갑전투인 쿠르스크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5년에는 주코프 원수의 제1벨로루시방면군 소속 사단참모장으로 바르샤바해방전투에 참가, 1945년 5월에는 베를린 점령작전에 참가하다 종전을 맞이한 인물이다. 그는 종전후, 고향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살다가 소련군의 지시로 다시 북한으로 가 1948년 교육성 부상, 1950년 강건의 사망으로 총참모장, 1953년 휴전협정 북한측 대표, 북한 외무상등으로 근무하였다. 비록, 허가이의 자살로 소련파가 숙청되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북한의 주요 직책을 담당한 것으로 보아 정치적 야심은 별로 없는 실무형 인물이 아니었던가라는 생각이 든다.


197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남일은 유럽전과 한국전을 다 경험하였다. 이러한 남일을 보면 한국인이 2차대전의 유명한 유럽전투에서 참가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마치 영화와 같고, 마치 영화 마이웨이의 장동건이 연상된다.



한국전쟁 당시, 남일


영화 마이웨이 화면캡쳐

반면, 한국에도 특이한 사례가 있는데, 그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5여단장 김상겸대령이 그 주인공이다.(5여단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지휘관 김상겸대령은 문책당하였다.) 한국인 출신으로 2차대전과 한국전을 겪은 전 미육군 대령 김영옥의 사례도 유명하지만, 김상겸 대령은 러시아군과 폴란드군, 한국군 장교로 세 나라의 군복을 입었던 인물이었다. 1883년생으로 알려진 김상겸 대령은 20세기초, 러시아로 이주 , 러시아 군사학교를 졸업, 터키주재 러시아 대사관에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1차대전에 대위로 참가 공을 세워, 영관장교로 근무하였으나 러시아혁명이후, 해임당한 것으로 보아 볼세비키와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벌어진 러시아내전에서 백러시아군으로 참전하였고, 1919년 볼세비키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백러시아군에 편입되어있던 폴란드부대를 이끌고 폴란드로 망명, 신생 폴란드군이 되어 대령까지 진급하였다. 1차대전이후, 동프로이센으로 이주, 2차대전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육사에 입교, 단기 교육후, 신생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하였다. 그는 1948년 5여단장으로 근무하다가 여순반란사건으로 해임당하였고, 이후, 군을 떠나게 된다.




김상겸과 그 가족(추정)

북한에는 남일장군이, 남한에는 김상겸대령이 우리 근현대사를 살아온 영화와 같은 삶을 산 인물들이었다.


E. 구일본군출신



북한군 창건이후, 일본군 전력자들이 전부 배제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북한 공군의 경우, 북한 공군의 초기 조직으로 평가되는 신의주 항공대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리활, 허민국, 강치우 등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거나 일본군에 종사했던 인물들이다. 또한, 1980년대 망명한 한 고위직 망명자의 진술(증언록)에 의하면 북한군 초기 일본군 장교 및 부사관, 학병 출신들이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아마도 신생군대에서 군경험을 가진 자원은 출신 여부와 관련없이 소중했을 것이다. 다만, 같은 일본군 출신이라도 태평양전선에서 싸운 일본군출신에 대한 차별은 별로 없었으나, 만주에서 복무한 일본군출신에대한 악감정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등에서 복무한 일본군 출신은 태생적으로 항일조선인부대와 운명적으로 격돌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임으로 이들에 대한 차별이나 숙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조선인민군의 창설



A. 조선인민군의 창설



북한군(이하 조선인민군)의 창설시기를 보는 견해는 한국과 북한간 보는 견해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조선인민군의 창설시기를 한국에서는 1948년 2월 8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945년 9월(10월이라는 설도 있다)부터 북한에서는 소련군정당국이 보안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10월 12일 소련군 제 25군 사령관 차티스코프 장군의 지시로 그 동안 자생해왔던 치안대와 적위군 등의 자경단에게 사실상의 해산명령을 내리고, 새로운 조직으로 편성하였다. 이후, 11월경, 이들 보안조직을 총괄하는 조선인으로 최용건이 임명되었고, 1946년 1월 북조선 철도경비사령부(일명: 철도 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6년 2월 남포에 간부 양성을 위한 평양학원이 설립되었고, 이 학교에서는 당시, 분단이 고착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별도의 대남반을 조직해 침투요원을 양성하였다.


또한, 1946년 6월 중앙보안간부학교가 설립되어 각종병과의 장교요원을 양성하였는데, 이 학교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많은 인민군 초급장교들이 양성되었다. 이들 학교의 상급 교관은 소련군출신이 많았고, 소련군사고문단(스미르노프 당시 소장)이 교육훈련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50년 3월 남침 직전에는 베를린 점령작전 등 독소전쟁의 경험을 가진 바시리예프(당시 중장)이하, 3000여명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북한군은 소련군의 전략과 전술을 배우며, 빠른 시간에 성장 할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북한군의 창설은 1948년 2월 8일 평양역 광장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25군 사령관 코르트코프 중장과 같은 소련군이 참석한 창군식을 기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1948년 2월 8일로 인민군의 창설시기를 기념해오다가 1978년 4월, 창건일을 1932년 4월 25일로 변경하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선인민군의 창설을 김일성의 항일무장부대(북한명 : 조선인민혁명군) 창설과 연관시키고, 소련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기 때문일 것이다.


1948년 조선인민군의 열병식


북한군의 주력은 1946년부터 개천, 나남, 원산, 유사리 등의 보안대와 철도경비대를 통합하여 북한군 훈련소에서 순차적으로 편성되었고, 이들은 인민군 1, 2, 3, 4 사단이 되었다.





B. 중국공산당의 조선인부대 편입



1948년 공식적인 창군이래, 1950년 한국전발발까지 매우 짧은 시기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소련군의 군사교육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군 출신의 조선인부대의 북한군의 편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북한군의 지휘부는 주로 빨치산파로 대부대 운영경험이 적었고, 편성된 신생 인민군 역시 전반적으로 실전 경험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일전과 국공내전에 참가한 중국 공산당군의 조선인부대가 북한군에 편입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이 확실시 되자, 부대감축차원에서 조선인부대를 북한군에 편입시키는 조중 비밀군사협정(1949. 3. )을 맺게 되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군에 참가한 조선인들의 대다수는 중국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자신들은 조선으로 진격할 수 있으리라 바램을 가지고 있었으나, 국공내전의 참가로 그들의 바램은 1949년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1949년 7월에서 8월까지 약 2만명의 중국 공산당군이 북한에 도착하였다. 이들 부대는 임표의 제4야전군 돌격부대로 활약하던 164사단과 166사단이었고, 지휘관은 김창덕과 방호산이었다. 이후, 20사단(1950 .5. 입북 사단장 전우) 등 이 입북하였고, 북한군 5, 6, 7 사단의 근간이 되었다.



북한군은 소련군의 지원으로 외형적인 모습은 군으로 모습을 갖추었지만, 실전경험이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군 조선인부대의 편입은 그 단점을 보완해주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이들은 철저히 약자의 입장에서 일본군과 국민당군과 전투하였기에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압도적인 한미연합군의 공격과 추적을 회피해가며 전투를 벌이며 전투력을 보존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 중공계 부대는 소련군계 1~4사단에 비해 개전부터 우회, 포위, 야간전투능력, 야간축성, 위장능력을 경험하여 북한군의 유무형 전력 육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미군과 미국 학자들이 가장 주목한 부대는 인민군 6사단(구중공군 166사단, 사단장 방호산)이었다. 그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작전시, 대규모 포병공격후, 진격했던 북한군 사단과는 달리, 끊어진 경의선 철도를 은밀히 복구하여 개성에 침투하여 한국군을 당황하게 하였고, 야간 이동만을 감행, 미군의 항공정찰을 따돌렸으며, 미군은 6사단의 주력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C. 한국군의 창설



반면, 한국은 국방경비대를 모체로 한국군을 창군하고 육성하였으나 그 수준이 경비부대급이었고, 북한군이 사단급 훈련을 해본 경험이 있는 반면, 한국군은 주로 대대급 훈련정도를 해보는 정도였다. 특히, 한국군은 1948년 14연대의 반란사건과 이후 벌어진 남로당 색출작업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1949년 강태무소령과 표문원소령이 2개대대를 이끌고 월북한 사건은 당시, 한국 정치계와 군에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미국정부는 한국에서 소수의 군사고문단을 남겨둔 채, 철수하였고, 이승만대통령은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통일을 할 것이라며 미국의 철수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일부에서는 이승만대통령의 한국전 이전, 북진통일론이 현실을 모르는 주장으로 비판하고 있으나, 그것은 이승만대통령의 고도의 외교술을 모르고 한 일반론에 불과하다. 이승만대통령은 여러 라인을 통해 북한군의 건설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으나 한국에서 미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도의 전술로 북진통일을 외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한국의 돌출행동(북진)가능성이 있는 한 미국이 한국을 막기위해 한반도에 계속 개입할 것이라 본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을 어떻게든 한국에 끌어들여 북한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며, 이러한 이승만대통령의 전략은 전후인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귀결되게 된다.



3. 남침계획의 시작



A. 남침계획



남침계획은 1950년 5월 바실리예프가 작성하여 러시아로 된 작전계획을 강건 총참모장에게 주어 강건이 이를 한글로 번역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작전계획은 소련 군사교리 그 자체였으며, 전쟁초기 북한군은 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반면, 한국군의 경우는 주로 미군 군사고문단의 지원하에 교육을 받고 있었으나 지휘부의 상당수가 일본 육사나 만군학교 출신자들로 구일본군의 전술전법에 익숙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변형된 노몬한 전투, 일소전쟁의 재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남북한 지휘관의 경력 표 참조



B. 남북한 지휘관의 경력과 특성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 처음 치르는 대규모 정규전이었다. 당시, 군 지휘부 대다수는 소련군과 일본군, 만주군의 대대장 및 중대장급으로 30대에 갑자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 군단장, 사단장으로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는 양쪽 모두 1910년 조선왕조가 패망함으로 군대가 폐지되어 정상적인 간부교육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대부대 운용경험이 있는 자는 무정과 방호산 등 연안파였고, 한국에서는 일본군 대령출신의 김석원 대령과 일부 중국 국민당군 출신 지휘관등이 거의 유일하였다.


무정은 대장정에 가담하고 중공군 포병사령관을 지냈으며, 방호산, 김창덕등은 중공군 사단장으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 소련 사단 편제의 규모는 미군 편제보다 작다.


김석원대령은 일본군 대령출신으로 조선왕조가 일본 육사(일본 육사27기)에 유학보낸 마지막 유학생으로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그 경험을 쌓았다. 특히, 김석원은 일본군 대대장 시절, 1개 대대로 중국 국민당군 2개연대의 공격을 박아낸 것으로 유명하며, 해외언론은 김석원을 일본도를 차고다녀 ‘타이거 김’으로 불렀다. 김석원은 일본군에서의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일본군의 잔학성(머리베기)과 지휘능력(유능함)을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혹은 일본군 2개중대로 중국군 1개연대을 막아냈다는 설도 있으나 같은 이야기로 생각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남북한 주요 지휘관들은 모두 만주와 연결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주로 동북항일연군, 88특별저격여단과 한국군은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에서 그 능력과 경험을 쌓았다. 특히, 흥미로운 인물은 후일,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와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이 되는 오진우였다.



다음은 남북한 주요 지휘관의 직책이다.



[ 한국전 당시, 남북한 지휘관의 주요 경력표 ]


■ 한국군


이 름



계급


당 시 직 책


(1950)


2차대전시계급


(1950년 나이추정)


후일 직책


비 고


채병덕


소장


참모총장


일군 소령


1916년생 34세


1950년 전사


일본 육사 47기


정일권


소장


참모총장


만군 대위


1917년생 33세


참모총장


만주군관 8기


유재흥


준장


7사단장


일군대위


1921년생 29세


국방장관


일본 육사55기


김석원


대령


수도사단장


일군대령


1893년생 57세


사단장


일본 육사 27기


백선엽


대령


1사단장


만군중위


1920년생 30세


참모총장


만주군관 9기


박정희


소령


육본 전투정보


군무원


만군 중위


1917년생 33세


대통령


만주군관


일본 육사 57 유학


백인엽


대령


17연대장


일군 소위


1923년생 27세


지원(추정)


사단장


■북한군


이 름


계급


당 시 직 책


(1950)


2차대전시계급


(나이추정)


후일 직책


비 고


김일성


원수


최고사령관


소련군 소령


1912년생 38세


북한 주석



남 일


중장


총참모장


소련군 대위


1913년생 37세


외무상



강 건


중장


총참모장


소련군 대위


1918년생 32세


전사



김광협


소장


2군단장


소련군 중위


1915년생 35세


총참모장



최 광


소장


1사단장


소련군 중위


1918년생 32세


총참모장



오진우


대좌


*총좌


766부대장


공산당원


1917년생 33세


인민무력부장



이학구


대좌


*총좌


2사단 참모장


공산당원


1950년 당시 28세추정



남측 투항


거제포로수용소 북측포로 대표



후일, 북송후


자살(추정)



박정희의 재임관



후일,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는 1950년 전쟁당시, 일종의 군무원신분이었다. 그는 남로당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고 예편되었으나,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과 장도영의 배려로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에서 일종의 군무원 신분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당시, 전투정보과에는 장도영 외에도 후일, 한국 중앙정보부(KCIA)의 창설자 김종필 중위도 같이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전투 정보과는 한국군 지휘부에 북한군의 공격가능성을 보고하였다. 정보문건마다 다르지만, 최초에는 1950년 3월로 예측했으나 전쟁직전에는 1950년 6월 25일 혹은 26일로 최종 결론을 보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 총책임자인 채병덕 장군은 이를 무시하였다. 장도영 등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육군 본부가 수원으로 철수 할 때, 박정희가 북한군에 가담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도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수원에서 그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장도영은 이에 박정희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버리고 박정희의 재임관을 육본에 건의, 박정희는 소령으로 재임관하였다.



*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공격을 최초로 육본에서 보고받은 인물중에는 한국의 총리가 되는 김종필 중위도 있었다.




오진우의 766부대



오진우는 항일무장투쟁시기, 김일성부대원중의 한명이며 한국전 발발당시, 766부대장(유격대장)으로 포항일대에서 북한군 5사단을 지원하고, 후방교란작전을 감행하였다. 그의 부대에 대한 이야기는 간혹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 등장하는 데, 2010년에 등장한 영화 ‘포화속으로’에도 등장한다.


영화 '포화속으로' 화면갭쳐



■ 766부대의 활약 : 영화 ‘포화속으로’



2010년 개봉된 영화 ‘포화속으로’는 1950년 있었던 포항지구 전투를 실화를 근간으로 하며, 1976년 영화 ‘학도의용군’을 현대적 감각으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당시, 포항여중을 포위했던 북한군 지휘관은 학도병과 소수의 행정병들에게 자신들과 전투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주문하였다. 당시, 북한군지휘관은 전투경험이 있는 자로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 학도병들과 전투에서 승패가 분명함으로 불필요한 희생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학도병들은 전투를 결의하고, 북한군과 교전하였고, 이 소수의 학도병들은 예상외로 쉽게 붕괴되지 않았고, 수시간 북한군의 진격을 묶어 두었고, 북한군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그러나, 학도병부대는 전혀 훈련받지 못한 상태에서 육탄전까지 불사하였고, 결과는 상당수의 학도병들이 전사하였지만, 이 시간동안 인근 한국군은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영화 ‘포화속으로’에 등장하는 북한군 부대는 인민군 766부대이고, 지휘관은 영화배우 차승원이 배역하였다.


영화 '포화속으로' 766부대장 차승원 화면캡쳐



영화속의 이 인민군 766부대는 실제, 한국전 당시, 존재했던 부대(유격대로 추정)로 지휘관은 오진우 (후일, 인민무력부장이 됨)였다. 766부대는 한국군 복장을 하고 미제 M-1소총으로 무장하고, 주로 한국출신으로 한국식어투를 사용하여 한국군 후방에 침투하여 지방의 게릴라와 연계하여 한국군을 괴롭혔다. 이는 독일군이 2차대전중 사용했던 침투부대와 유사하며, 이들은 주로 미국출신이거나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자들로 영어를 사용하여 미군의 후방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오진우, 한국전당시 766부대장

766부대의 일부(2개대대)는 개전시, 어선과 소형화물선을 이용하여 강릉해안에 상륙하여 동해안 도로의 주요 지점들을 확보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군 8사단을 분산시키고, 내륙으로 퇴각시킴으로 인민군 5사단을 지원하였고, 한국군 후방에서 한국군으로 위장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당한 상황에서 최후의 순간, 월북하였다.


(계속)



[더퍼블릭 = 김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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